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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꿈, 상징주의와 나비파

by 글쓴이§※↔※↔ 2021. 9. 11.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상징주의는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난 예술 사조이지만 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나라 중 하나로 프랑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기계 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거부하는 지식인 및 예술가들은 형언할 수 없는 것들, 즉 생각이나 내적 환영, 꿈과 같은 것 들을 표현해내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주제 면에서나 표현 방식 면 에서 상징주의가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설명해 줍니다. 상징주의는 미술 사조이기 이전에 1886년 시인 장 모레아스가 「르 피가로」의 호외판에 「상징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자리매김한 문예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를 본받아, 젊은 작가들은 묘사보다 암시를 선호하고 지칭보다 은유를 우선시하게 되었습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 비밀스런 조화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이들은, '향기와 색, 소리는 서로 응답한다'는 샤를 보들레르 방식의 '조응' 이론을 채택합니다.

뛰비 드 샤반의 작품에서 보여지듯 오르페우스의 신화는 창작물과 사고를 통해 예술가의 영원함을 묘사한다는 측면에서 상징주의 예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제 중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1881년 살롱에 소개되면서부터 「가난한 어부」 는 굉장한 열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작품은 고갱, 쇠라, 시냐크, 르동, 카리에르, 마을, 드니 혹은 피카소 등 작가들의 시선을 단번에 장악했습니다.

이 작품으로부터 발산되는 억제된 감정은 공백이 지배하는 구성과 제한된 색, 움직임, 그림자 및 묘사의 결여, 시간을 초월한 풍경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환상과 무의식에 사로잡힌 르동은 목탄화와 석판화로 자신의 초기 예술 세계를 구축합니다. 회화 작업을 한 순간도 놓지 않았던 르동은 1890년에 이르러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간직하면서 색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말라르메의 친한 친구이자 '신비한 꿈의 왕자'라고 불려진 르동은 환상과 비시각적인 것에 환호합니다. 데생과 석판화에 충실했던 그는 스스로 '다소 회색 빛'이라 특징짓는 「감은 눈」을 1890년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색의 세계로 입문합니다.

에밀 프리앙과 벨기에의 레옹 프레데릭의 그림이 잘 나타내고 있듯이 상징주의는 풍경과 인물, 사실 주의, 자연주의 등의 모든 회화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파리시의 입시세 관리소의 사무원이었기 때문에 '세관원'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앙리 루소의 초라한 삶은 그의 작품 속 기묘한 세계 및 독특한 스타일과 대조됩니다.

인상주의 화가와 정확히 시대를 같이 하며 그는 세기 전환 시대의 미술사에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린 식물과 동물의 세계는 놀랍도록 대범하게 표현되어서 20세기의 '혁명적인' 움직임을 예고했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나비파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상징주의의 거대한 등장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기원은 1888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 폴 세뤼지에는 퐁타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르 숲의 한 권에서 '이 나무가 어떻게 보이십니까'라 고 고갱이 물었다. 푸른 색인가요? 그럼 녹색을, 팔레트 위의 가장 아름다운 녹색을 칠하세요. 그리고 이 그림자는 파란색 으로 보이나요? 그럼 가장 파란색에 가까운 색으로 그리는 것을 두려워 마세요." 「부적」(1888, 오르세 미술관 소장)이라는 제목의 이 빛나는 풍경화는 절리앙 아카데미의 동료인 랑송, 드니, 보나르와 이들을 추종하던 뷔야르와 루셀에게 있어서 매우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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