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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삶을 찾은, 고갱과 퐁타방파

by 글쓴이§※↔※↔ 2021. 9. 8.

1888년 풍타방에서 폴 고갱은 '나는 야생과 원시가 공존하 는 브르타뉴 지방을 사랑한다. 내가 신은 나막신이 화강암 바닥에 부딪치며 소리가 올릴 때, 나는 묵직하고 불투명하 면서도 강렬한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이 소리를 그림 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라고 적었습니다.

브르타뉴는 오랫동안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어서 산업화된 도시가 갖춘 모든 조건들이 부재하며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삶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브르타뉴가 가진 단순하면서도 정열적이고 동시에 우울한 분위기, 비밀과 전설에 대한 숭배, 신비함에 대한 열정, 거칠고 매혹적인 대자연,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바다 내음 가득한 공기 등은 고갱과 그의 동료들에게 마치 신세계의 발견과 같았습니다.

1860년부터 풍타방에는 '축제의 지역'에 이끌린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집단을 이루어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특별하고 매우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며 진정으로 혁신적인 미학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 작은 마을은 1862년에 이르러 예술가 들의 은신처가 되었는데, 파리의 예술 아카데미와 학교가 문을 닫는 여름 동안 미국 예술가들은 가장 먼저 풍타방을 찾 았고 덴마크 예술가 모겐스 발린사이에 Ballin 등 북유럽 예술가들이 그 뒤를 이었으며 심지어 블라스디슬라우 슬레빈스 키워크스스러스트 Slevinal 같은 플란드 예술가도 통타방을 찾곤 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예찬했던 데생 화가인 네덜란드 출신의 '메이예르 대 한' 역시 1888년에 고갱과 함께 했습니다. 도면의 고갱이 처음 브르타뉴를 찾은 1886년경 그는 인상주의 파 화가들의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며 반 고흐와 루이 앙크탱의 친구였던 스무 살 남짓의 젊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를 만납니다.

그는 새로운 화법을 탐구하고 있던 중이었고 1886년 8월 24일 부모에게 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인상주의 계열의 화가 고갱은 무척 뛰어납니다. 그는 그림을 무척 잘 그리며 이론적이지 않습니다."

고갱이 두 번째로 풍타방을 찾았을때 이 두 사람은 비로소 종합적이고 단순화된 회화 기법을 구상하면서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보여지듯이 택심적인 형제만 검은 선으로 데두리를 그렸으며 불투명한 색채를 사용하여 자의적이고 상징적인 작품을 고안했는데 미술 평론가에 두아르 뒤자르댕은 1888년 3월 「라 르뷔 앵데광당트」에 기고한 글에서 이를 '클루아조니즘'이라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드가, 피사로 혹은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의 후배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갱 역시 일본 우키요에 예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상화 「아름다운 앙젤」 (1888. 오르세 미술관 소장)에서 보여지듯 모델은 '일본풍으 로' 원 안에 그려졌습니다.

드가는 이후 1891년 이 그림을 구입하게 되고 이 덕분에 고갱은 처음으로 타히티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화풍의 영향은 「부채가 있는 정물」도한과에서도 나타납니다. 고갱은 자신이 추구하던 장식 경향에 맞는 일본식 형태와 선명한 색감, 그의 도자기 작품 「巻 달린 쥐」가 발산 하는 거친 분위기를 담아냈습니다.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한 아름다움을 재현해내는 것을 거부하던 예술가들은 풍경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분석했던 방식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리석게'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풍타방에서 종합주의 화가들은 신비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고갱은 '자연을 그대로 모사하지 말라. 예술은 추상이다. 자연을 마주해 꿈으로 꾸고 그것을 통해 추상을 이끌어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풍경화 속 충실한 묘사를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샤를 보들레르와 의견을 같이하며 풍경화 화가들이 상상력을 되찾기를 희망했습니다. '나는 붉은 색의 초원과 파란색의 나무를 원한다. 자연 그 자체는 상상력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수첩에 기록했습니다.

1888년 볼 세뷔지에는 고갱의 지시를 따라 원색을 나열하여 거의 추상적으로 나타낸 풍경화 「부적」(오르세 미술관 소 장)을 발표했으며, 촛날 이 유명한 작품을 가리켜 모리스 드 니는 '풍경은 종합적으로 정제되어 그려진 이후에야 가치를 갖는다.'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세튀지에는 랑송, 드니, 보나르, 뷔야르, 루셀 등 이후 나비파 창립 구성원이 되는 아카데미 절리앙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고갱의 예술세계를 소개했습니다.

그 이후 1889년 세계박람회가 열리던 팔레 대 보자르의 아케이드에 위치한 카페 '볼피니'에서 종합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드니는 이 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찬란하고 새로운 발견인가! 인상주의 작품처럼 대자연을 관찰하기 위한 창문이 아니라, 장식 요소로 무겁게 채워지고, 색은 거칠게 칠해졌으며, 선으로 구분된 작품 이었다." 「노란 건초더미」 도전하는 선으로 형체를 강조한 원색의 그림으로, 그림이 될 만한 소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며 시간을 초월한 장면을 재현해내고 있습니다.

세위지에는 브르타뉴에 머무르는 동안 강렬한 색을 사용하고 형체를 선으로 강조한 여러 작품들을 그림으로써 고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특징은 「르 풀뒤의 꽃이 핀 울타리」도 현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긴고한 구성이 두드리지는 그림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드가 고갱과 베르나르가 장시한 풍타방 지역의 예술 경향은 베르나르의 작품 「상징적인 자화상」 돼지에서 볼 수 있듯이 다소 상징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그림에서 화가는 의심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습니다. 풍타방파에서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데서 오는 근심이 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반 고흐의 죽음과 고갱과의 이별은 예술적으로 그를 격리시켰고 그의 개인적인 삶 또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는 신비로우면서도 종교적인 표현 양식으로 전환하면서 이 자화상을 발표했습니다. 작품에는 끊임없는 질문에 답을 구하는 화가가 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 주변으로 그의 다른 그림에서 나타나는 목욕하는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표현의 장을 열고 있으나 베르나르는 이후 다시 전통적인 작업 방식으로 회귀합니다. 거친 표현과 섬광 같은 강렬함이 지배적이며 때로는 수수께끼 같기도 한 이러한 작품들은 고갱의 영혼을 가득 새운 야생의 브르타뉴에 대한 그리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야생과 천국의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던 브르타뉴는 곧 고갱의 타히티에 대한 연망을 일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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