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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

by 글쓴이§※↔※↔ 2021. 11. 22.

지오반니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토르나부오니는 성공적인 사업가로 1427년에 피렌체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납세자였다. 그의 과세 대상 재산은 46,320 플로린으로 상당했다.프란체스코 토르나부오니는 두 번째 아내 난나 디 니콜로 귀차르디니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루크레치아와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가 가장 유명하다. 루크레치아는 1444년에 피에로 데 메디치와 결혼했고 1449년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유명해졌다. 그러므로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삼촌이다.

그는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의 형제이자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삼촌인 메디치 가문과 강한 연줄이 있었다.[2] 1443년 교황 식스토 4세의 회계 담당자로서 전임자인 레오나르도 베르나치가 로마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4]

1475년경,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에게 여동생의 초상화를 의뢰했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5]

그는 또한 1480년과 1484년, 1482년에는 곤팔로니에레 디 주스티치아에서 피렌체 대사를 지냈다. 1485년 그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토르나부오니 성당이 될 프레스코화의 그랜드 사이클 계약을 맺었다.토르나부오니와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피티는 합창단 벽에 기부자로 묘사된다. 그는 이미 기를란다이오가 안드레아와 바울의 천직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묘사한 바 있다.

조반니와 로렌초는 아마도 1486년에 조반니의 아들 로렌초의 알비치 가문의 지오바나와의 결혼식을 위해 의뢰받은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일곱 개의 교양 예술에 소개된 젊은이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7]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가 그린 토르나부오니 채플 프레스코화가 완성된 1490년 무렵, 토르나부오니의 가족과 정치적 동지들은 전통적인 무릎을 꿇은 그의 부인의 초상화 외에도 상당한 수의 장면들로 채워졌다.[8]

1492년 4월 8일 로렌초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계자는 20살 된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1472–1521)에게 넘어갔다.[9] 피에로는 은행 경영에 재능이 없었고 그의 비서관과 그의 종조부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두 사람은 은행을 잘못 운영했고 신임 장관인 조밤바티스타 브라치의 노력을 방해했다.[10]

1494년에 토르나부오니는 메디치 은행의 지휘로 프란체스코 사세티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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